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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여행/천여 년간 남도의 중심지였던 나주 객사 금성관

윤 중 2012. 8. 15.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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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여행/나주 문화재 탐방/나주객사 금성관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누어 전라남도청이 광주에 설치될 때까지

나주는 천여 년간 남도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나주목 관아 중심공간이었던 나주목 객사 공간이고

관아는 넓게 해석하면 읍성과 내부의 각종 건물을 이르는 말이며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던 곳이고

중앙의 사신이 지방에 오면 묵던 곳이었다.

 

 객사의 정청에는 전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권례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서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 곳이었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 외삼문인 망화루(望華樓)

 나주목 객사 금성관의 가장 바깥에 있는 문으로

세 칸 규모의 2층 문루이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 중삼문(中三門) 

나주목 객사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의 중간에 있던 문이다.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

 조선 시대 성종 18년(1487)~ 20년(1489)의 나주목 객사는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의 유형문화재 제2호이다.

 

 

 

 

 

 

 

 

금성관의 동, 서익헌과 망화루 등은 일본 강점기에 없어지고 금성관만 남았으나

이를 개조하여 사용함으로써 원형이 상실되었고

금성관 앞쪽으로는 나주 군청사가 있었으나 2005년 철거하고

외삼문인 망화루를 복원하였으며 발굴조사 결과 월대와 박석 내삼문,

각종 부속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금성관에서 나주목 객사 외삼문 쪽을 본 모습  

 

 

 

 

 

나주목 객사의 동쪽에 있는 건물로 관찰사가 나주에 왔을 때

집무처로 사용하였으며, 품계가 정3품 이상의 관리가 묵었던 곳이다.

조선 초 이행(1403, 1~1404, 5 재임) 관찰사가 벽오동 나무가

근처에 있어 벽오헌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몇 차례의 중수와 개수를 거쳐 1976년 완전 해체 복원하였다

 


 

 

 

 금성관의 옆 모습

 

 

 

 

 

 

 나주목 객사 금성관 뒤쪽에 있는 수령 650년으로 은행나무로 

  나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좌측의 금성토평비는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 새웠다

 

우측의사교비는 조선 시대 나주목이 금성헌으로 강등되었을 당시

정지호(1650~1653 재임) 현감이 사마교를 보수한 내력을 기록하여

1651년(효종 2)에 세운 것이다.

 

 



 

 우물

 

 

 

나주 객사 금성관

전남 나주시 과언동 1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