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행/경상도

경남 창녕여행/만옥정공원의 신라 진흥왕 척경비, 척화비, 객사, 석탑 등 답사

윤 중 2012. 10. 18. 05:58
728x90

문화재답사/창녕여행/창녕 진흥왕 척경비

 

 생태 천국 창녕이자 귀농의 천국인 창녕으로의 여행 중에

 읍내 중심부에 있는 만옥정 공원을 찾아본다

 

만옥정 공원에는 국보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창녕척화비, 창녕 객사, UN 전적비, 퇴천 삼층석탑

  등이 있고 산책로가 조성된 시민의 휴식 공원이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

(巡狩: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 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국보 33호) 

 

 

 

창녕 만옥정 공원 안내도 

 국보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창녕척화비, 창녕객사,

 UN 전적비, 퇴천삼층석탑 등이 있는 공원이다

 

 

 

 

 이 비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540~576)이 세운 기념비이다

비문 첫머리에 "신사년 2월 1일 입"은 진흥왕 22년(561)으로 추정되어 기존

3개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부분은

관련 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대게 한 줄에 26자씩 적었고 끝줄은 3자이다.

돌의 크기는 높이 178㎝, 폭 175, 두께 약 30이다.

본래 화왕산 기슭에 있었던 것을 1914년에 발견하였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국보 제33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의 앞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의 뒷면

 

 

 

 앞쪽의 화왕산 기슭에 있던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를 이곳으로 옮겼다

 

 

 

창녕척화비(昌寧斥和碑) 

 척화비(斥和碑)는 조선 고종 때 홍선대원군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종로 네거리를 위시한 전국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세운 비석(碑石)이다

 

洋夷侵犯非戰則 和主和賣國 (양이침범비전즉 화주화매국)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다

높이 123㎝, 폭 46㎝, 두께 20㎝이다.(문화재자료 218)

 

 

 

 

 

창녕객사(昌寧客舍)

객사는 조선 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당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좌·우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고 1924년 군수 이장희가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이곳 만옥정에 옮기고 보수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바닥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기단 위에 곧바로 세웠으며 기둥 사이에는 벽을 쌓지 않아

 주위의 경관을 볼 수 있게 했다. 앞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들의 기둥 사이에 나무 2개를

 가로로 설치해 행사 때 발이나 병풍을 치기 쉽게 했으며,

건물 전체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지어진 건물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물로 추측된다(문화재청)

(시도유형문화재 231)

 

 

 

퇴천 3층 석탑(兎川三層石塔)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창녕의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탑은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시도유형문화재 10)

 

 

 

 

창녕 현감 비군

 

 

 

창녕 진흥왕 척경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창녕 만옥정공원 내)

055) 530-1473